반 고흐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은 어떻게 그려졌나
요양원에 들어간 지 한 달, 반 고흐는 사이프러스를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에 비유하며 이 그림을 그렸다. 같은 달에 〈별이 빛나는 밤〉이 나왔다. 세 가지 버전과 테오에게 보낸 편지로 다시 읽는 후기인상주의의 한 장면.

이미지 ©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1889) · The Met, Purchase, The Annenberg Foundation Gift, 1993 (CC0)
소용돌이치는 구름, 바람에 통째로 일렁이는 밀밭, 불꽃처럼 솟은 짙은 사이프러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822번 전시실에 걸린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1889)은 반 고흐의 그림 가운데 가장 많이 복제된 축에 든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그림이기도 하다. 이 글은 이 그림이 언제 어디서 어떤 마음으로 그려졌는지, 왜 같은 그림이 세 점 있는지, 그리고 '후기인상주의'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따라간다. 이미지는 모두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한 것이다.
1889년 5월, 생 레미
1889년 5월 반 고흐는 남프랑스 생 레미의 생폴 드 모졸 요양원에 스스로 들어갔다. 아를에서 귀를 자른 사건 뒤였다. 그는 이곳에서 약 1년을 지내며 150점 가까운 캔버스를 그렸고, 이듬해 5월 파리 근교 오베르로 옮겨 두 달 뒤 밀밭에서 생을 마쳤다. 요양원 창밖으로는 알피유 산맥과 밀밭, 올리브나무, 그리고 사이프러스가 보였다. 6월 초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해 뜨기 한참 전에 창문으로 시골 풍경을 오래 바라봤다, 아주 커 보이는 샛별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썼다. 그 새벽의 기억이 6월 중순 〈별이 빛나는 밤〉이 됐다. 그리고 같은 달 말, 그는 낮의 풍경으로 돌아와 이 밀밭을 그렸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같은" 나무
6월 25일 편지에서 반 고흐는 사이프러스에 사로잡혀 있다고 고백한다. "사이프러스가 여전히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어. 해바라기 캔버스처럼 그걸로 뭔가 하고 싶어." 그는 이 나무를 "선과 비례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답다"고 했고, "햇빛 쏟아지는 풍경 속의 어두운 얼룩이지만 가장 흥미로운 어두운 음 가운데 하나"라고 썼다. 일주일 뒤인 7월 2일 편지에는 이 그림이 직접 등장한다. "사이프러스와 밀 이삭 몇 개, 양귀비, 파란 하늘이 있는 캔버스가 있는데, 여러 색이 섞인 스코틀랜드 타탄 같아." 하늘을 격자무늬 천에 비유한 것이다. 메트 소장본은 바로 이 무렵 요양원 바깥에서 실경을 보고 그린 현장 습작으로, 반 고흐 스스로 그해 여름 풍경화 중 가장 잘된 것 하나로 꼽았다.
같은 달에 그린 〈사이프러스〉(1889). 편지에서 말한 "오벨리스크"가 여기서는 화면 전체를 차지한다. The Met, Rogers Fund, 1949 (CC0)
왜 세 점인가
같은 구도의 그림이 세 점 있다. 첫 번째는 6월 말 야외에서 그린 메트 소장본(73.2×93.4cm)이다. 두 번째는 그해 9월, 발작 뒤 방에 머물면서 첫 번째 그림을 보고 스튜디오에서 다시 그린 정제본으로 지금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있다. 1923년 코톨드 기금으로 구입됐다. 세 번째는 어머니와 여동생에게 보내려고 만든 소형본으로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9월 5일 편지에서 그는 네덜란드의 가족을 위해 그림 몇 점을 만들 계획을 말하며 "추수하는 사람, 침실, 올리브나무, 밀밭과 사이프러스, 그러면 넷"이라고 목록을 적었고, 10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는 실제로 "밀밭과 사이프러스"가 포함돼 있다. 그러니까 메트본은 즉흥, 런던본은 완성, 소형본은 선물이다. 세 점을 나란히 두면 붓질의 속도가 다른 것이 보인다. 야외에서 그린 메트본의 하늘이 가장 거칠고, 런던본은 구름의 곡선이 정돈돼 있다.
사실이 아니라 떨림을 그리다
이 그림에서 하늘은 실제처럼 잔잔하지 않다. 구름은 소용돌이치고 밀밭은 바람에 통째로 일렁이며 사이프러스는 위로 타오른다.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감정의 풍경이다. 반 고흐는 자연을 정확히 그리는 대신 자연 앞에서 자신이 느낀 떨림을 그렸고, 그 떨림을 전달하기 위해 물감을 두껍게 올리고 붓 자국을 지우지 않았다. 인상주의가 빛이 망막에 닿는 순간을 잡으려 했다면, 그는 그 빛이 마음에 남긴 자국을 그렸다. 같은 풍경이라도 누가 그렸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기인상주의'라는 이름
이 말은 반 고흐가 죽고 20년 뒤에 생겼다. 1910년 영국 비평가 로저 프라이가 런던 그래프턴 갤러리에서 《마네와 후기인상주의자들》이라는 전시를 열며 처음 썼다. 1886년 마지막 인상주의 그룹전 이후 인상주의에서 갈라져 나온 변화를 묶는 말로, 세잔·고갱·쇠라·반 고흐가 핵심이었다. 넷은 서로 닮지 않았다. 세잔은 형태를 쌓았고 쇠라는 점을 찍었으며 고갱은 색면을 평평하게 깔았고 반 고흐는 붓질을 드러냈다. 공통점은 하나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그림의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것. 그 태도가 20세기 미술의 출발점이 됐다.
요양원을 떠나기 직전인 1890년 5월에 그린 〈아이리스〉. 생 레미 시기의 마지막 정물 가운데 하나다. The Met, Gift of Adele R. Levy, 1958 (CC0)
어렵게 볼 필요가 없다
후기인상주의를 이해하는 기준은 '얼마나 똑같이 그렸나'가 아니라 '무엇을 느끼게 하나'다. 그렇게 보면 반 고흐의 거친 붓질이 왜 130년 넘게 사람들을 흔드는지가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원화를 서울에서 볼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2024년 겨울부터 2025년 봄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불멸의 화가 반 고흐》는 50만 명이 찾아 그해 예술의전당 최다 관객 전시가 됐고, 지금은 국내에 예정된 원화 전시가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 그림을 포함한 소장품 이미지를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열어 두었다. 화면으로라도 하늘의 타탄 무늬를 찾아보는 것으로 시작하면 된다.
편지 인용은 반 고흐 미술관·하위헌스 연구소의 vangoghletters.org 영역본을 Placia가 옮겼다. 작품 정보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품 페이지, 용어 유래는 테이트 용어사전을 따랐다.